성민화 <보이_지않_는> un_seen
그가 본 것, 보이(지 않)는 것
작가는 눈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린다. (그린다는 것은 적절한 표현은 아닐지라도 우선 그렇게 말하고는) 눈이 닿는 곳에, 멈춘 곳에 있는 것들을 그린다. 아마도 이것이 작가의 드로잉적인 작업에서 공통적이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한 가지 요소일 것이다. 보이는 그대로 그려진 대상들은 정교하게 재현적이고 사실적이지만, 간결한 드로잉 선은 대상들에게서 기표의 힘을 약화시키고, 대상은 부분적으로만 그려져 어떤 것도 조망된 전체를 이루지 않는다. 작가의 눈과 신체는 그가 그린 대상들, 아니 차라리 장면들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눈과 신체는 종종 장면들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면서 그의 시각적 전망을 너무나 사적인 시선으로 만들고, 시각의 투명성을 방해한다. 시각의 투명성은 데카르트적 주체로서 보는 주체가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고, 기하학적 원근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이다. 성민화의 작업에서 시각의 근접성은 그러한 투명성을 방해하고,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시각 주체이자 관찰자로서의 스스로의 지위를 흔들리게 한다. 그 결과 그의 시선은 종종 매우 협소한 부분에 집중되고, 추상적 관찰자라면 포기했을, 비워냈을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 위치하기도 한다. 이는 육화된 시선이자 동적인 신체의 감각이다. 예를 들어 이전의 전시 <Walk>나 <Visit>에서 보여주었던 작업들에서 이 움직임의 느낌, 신체가 세계 내에 있는 느낌은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대상들은 작가가 집 밖으로 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처럼(<Way Out>, 2008), 혹은 나가자마자 길모퉁이를 돌면서 만나는 건축물처럼(<Turn Left>, 2015), 처음 본 낯선 곳의 대성당처럼(<Erstes Bier>, 2013) 관찰자를 이동 경로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물론 그가 대상 세계를 완전히 조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선을 포기했을지라도, 그의 시선이 아무리 대상에 근접 하다고 할지라도, 작가의 신체와 세계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한다. <Temporary Home>(2010)이나 <Carrousel>(2015)과 같은 작업에서 그의 시선은 외적인 거리를 분명하게 유지하고, (결코 클로즈업 되거나 강조되지 않은) 사물들은 객관적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바라보기를 가능하게 하는 거리이고, 대상을 나와 분리시킬 수 있는 거리이다. 이러한 거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길게 붙여진 장면들은 그것이 마치 시공간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스틸 사진처럼 잘려지고 붙여져 관찰자의 시공간을 분열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수학적으로 정량화할 수 없는 시선의 움직임이 발생한다. 시공간의 분열은 16세기나 17세기 고전적 회화가 구성했던 시선의 정해진 움직임과 궤도와는 다른 시각의 움직임을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고정된 눈이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으며 사물 사이사이 끼어들고, 빠져나가는 눈의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이 보는 주체를 그림의 시각장 속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아닐는지.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세밀하게 그려내는 대상의 세부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술사학자인 다니엘 아라스Daniel Arrasse는 디테일이 전체의 부분인 동시에 디테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의 행동의 흔적 내지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디테일은 사물을 ‘나누는’ 주체를 전제한다”고 오마르 칼라브레제Omar Calebrese를 인용한다. ‘나누는 주체’란 아마도 사물에 대한 자기 충족적이고 동일적인 이상을 분열시키는, 재현 주체이자 지각 주체인, 디테일을 생산하는 주체의 행동을 강조하고, 바로크주의가 발현시켰던 주관주의적 시각체계의 관계를 환기시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나누는 행위는 사물과 주체를 구분될 수 없는 형태로 나누는 것,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는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나누어진 것들의 합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지 못한다. 물론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닐 때 일어나는 ‘빈 공간에 대한 공포’는 그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를 계속하게 하지만, 나누는 주체는 그 간극이 메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일종의 사건으로 존재한다. 아라스는 이 두 운동을 그림의 계기, 창조의 계기, 지각의 계기라고 부른다. 세부적인 것은 “그림 속에서 사건을 일으키며 강력하게 시선을 붙들어 [그림 속에서 이미] 구성되어 있는 시선의 경로를 동요시키는 경향이 있는 계기이다.” [1] 경이로움을 일으키는 디테일에 관찰자는 종종 매혹되며 시선의 경로를 잃을 위험에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시킨다. 성민화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세부적인 묘사에 대한 탐닉 역시 시선의 경로이탈 계기가 된다. <Walking MC>(2013)의 세부적인 묘사는 길을 가다 시선을 사로잡혀 멈추게 만드는 것들이 되고, <Window on exhibition>(2016)에서 열린 창문 밖의 세밀함은 전시장에서 봤던 것을 모두 망각하게 하는 -이탈에 노출되고, 시각장에 사로잡히는- 어떤 것이 된다.
그런데 성민화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섬세함과 정교함은 매우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과정의 결과이다. 이것이 그의 그림을 단순히 그렸다고 말하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마치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기술의 결과물도 아니라는 점을 우선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의 작업은 대개의 경우 작가의 순수한 신체적 노동(노동이라는 말의 사용이 정당한가는 유보하고)의 결과처럼 보인다. 많은 질문들은 그가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했는가에 맞춰지거나, 기계적으로 보이지 않는 외양을 위해 왜 기술을 사용하는지에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그의 정교한 선이 작가가 사용하는 다양한 매체support로 옮겨지기 위해서 기술의 사용은 매우 유용할 뿐만 아니라, 기계적인 반복은 작업을 단순한 재현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작가는 편집증적으로 섬세한 과정들을 반복한다. 드로잉을 하고,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여 그것을 복제하고 화면에 구성하고, 매체에 적절하게 신체적이거나 기술적인 방법을 통해 가시화한다. 이 과정에서 손으로 그린 드로잉을 그대로 전사하는 기계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할지라도 “기계는 결코 신체적 역량의 단순 복제품이 아니다.”[2] 기술의 사용은 성민화의 작업이 인간적인 흔적을 간직한 채 인간적인 흔적을 넘어서는 방법이다. 레이저 컷은 작가의 손보다 더 섬세하게 작가의 드로잉을 반복하고 생산한다. 기계는 신체적 행위로 그려진 선의 흔적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신체적 행위를 넘어서는 섬세함, 기술로만 가능했던 섬세함을 가지고 재현한다. 기술의 반복 운동은 대상을 동일한 것으로 재생산하는 단순한 도구적 과정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는 기계적인 제스처, 모방을 넘어서는 미메시스의 움직임, 재현이자 재현을 넘어서게 하는 어떤 것이다.
전시 <보이_지않_는>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예술의 오래된 물음을 반복한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기 위해 예술은 상상력을 동원하고, 인식론적 눈을 동원하고, 기술과 기교를 동원한다. 칸트는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이성에 종속시킴으로써 그것을 사유의 문제로 이동시켰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유와 시선의 불완전성과 불가능성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예술은 분명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탁월한 방법이지만, 동시에 비가시적인 것은 상상력으로든 사유로든 완전하게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오래된 물음 사이에서 성민화의 전시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작가가 선택한 대상들이 너무 잘 보이는 사물들이라는 사실이다. 일상적인 사물이라는 것이 과도하리만큼 강조되는 그것들은 비가시적인invisible 것(예를 들어 영혼이나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것)과는 다른 것처럼, ‘연필꽂이에 영혼이 있어요’라는 순진한 진술과도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가 전시 제목에 언더바를 사용해 <보이_지않_는>이라고 멈칫거리며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작가가 사물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everybody has_glass>(2016)은 목적으로부터 빗나간 대상들을 보여준다. 그것의 원래 이름은 유리잔과 컵, 깡통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모두 연필꽂이로 전환되었다. 모두 연필꽂이로 손색이 없지만, 또한 어떤 것으로도 대체 가능한 것들이다. 여기서 목적을 충족시키는 대상이라는 실용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무력하기만 하다. 인간과 사물 간의 관계를 상상해 본다는 것은 대상에 혼돈을 가져오는 것과 같다. 안경을 안경으로 만드는 것은 안경과의 관계이고, 그것이 대상화되는 것은 일종의 결속력, 모든 것을 제자리에 있게 만들어 주는 결속력 덕이다. 그러나 사물은 대상 관계에 혼돈을 가져오는 어떤 것이다. 콥젝Copjec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의 객관성이나 그 객관성의 붕괴를 결정하는 것은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계이다.”[3] 사물은 지배할 수 있는 대상 속에 지배할 수 없는 어떤 차원이고,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고, 따라서 “친숙하지만 더 이상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4]것이다.
<보이_지않_는>에서 작가는 “친숙하지만 더 이상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물의 차원을 추적한다. 예를 들어 <Gone things>(2016)는 늘 사라지는 것들, 그러나 늘 다시 발견되는 것들(늘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들, 너무 빨리 발견되거나 너무 늦게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것은 물신(物神)적 가치를 갖기에는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지만 우리를 다분히 종속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종속적이란 말이 이 사소한 물건과 인간이 서로를 지배하려는 대립적 구도에서 이해된다는 것은 분명 아니다. 사라지면 다시 사면 되는 물건이지만 동시에 사라지면 너무나 불편한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 그것들은 사라져서 우리를 히스테릭 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우리가 그러므로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사물들이 아니다. 사물은 상품과 달리 인간을 불편하게 하고 종종 주체를 초과하기까지 하는 어떤 것이다. <ghost>(2016) 시리즈는 주방, 욕실, 작업실 등에서 발견되고 분리된 일상의 물건들로, 아주 얇은 7장의 일본 종이에 그려졌고, 각각의 선들은 서로 다른 밀도를 가지며, 조금씩 이동한 위치에 그려졌다. 7번의 반복된 드로잉은 대상의 동일성을 가져 오지 못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동일적 재현의 불가능성을 가시화 한다. 결과적으로 대상은 섬세하지만 흐릿하고 흔들리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작가는 작가의 집과 작업실과 같이 친밀한 공간에 존재하는 그 익숙하고 일상적인 사물들이 어느 순간, “느닷없이” 자신을 초과하는 사물이 되는 것을 목격했다. 바로 그곳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사라지는 것의 경험, 그것은 프로이트Freud가 사물이라고 부른 “전적으로 낯선 타자 안에 있는 어떤 것과의 마주침”이었을 것이다. 사물이 대상의 낯선 타자라면 “사물들은 우리 밖에 있지 않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는다. ... 대상과는 가깝고 인간과는 멀리 떨어진 영역, 더 이상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은, ... 우리 앞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5] 아감벤에 따르면 이 어디에도 없는 공간은 우리에게 더 근원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사물을 만나는 경험, 유령적 음모의 경험을 아마도 성민화는 작가 J씨의 물건들을 통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 J씨가 소유한 물건들을 탐구하는 시리즈는 일종의 초상화이다. <Carrousel>이 작가 자신의 초상화인 것처럼, 작가는 J씨가 소유한 물건들을 통해 J씨를 밝혀내고, 이해하려고 한다. 활자 중독자이자 지독한 수집가인 J씨는 수천 권의 장서를 아름다운 플로렌스페이퍼로 포장한다. 그리고 J씨는 그러한 행위를 명상에 비유한다. 섬세한 취향의 J씨는 보들레르라면 칭송했을 댄디와 같이 과도함과 우아함만을 갖는다.[6] 성민화는 J씨가 물신화하는 물건들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지만, 그것은 애초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물건들은 J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어떤 물건을 보고 누군가를 연상하듯이 그것은 ‘그’이기도 하다. J씨는 그가 애착을 갖고 있는 사물들에 의해 지시되지만 그것이 J씨를 완전히 대체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파편적인 이해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책이든, 저울추이든 슬리퍼이든 혹은 풀 수 없게 꼬여 버린 이어폰이든 (J씨가 저항할 수 없는) 사물들은 J씨를 파편적으로만 혹은 계속 빗겨가면서 지시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J씨를 그곳에 있게 하는 사물들이기도 하다. J씨는 그것 없이 설명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의 물신적 사물들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작가는 J씨를 그가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J씨를 사물로 그리는 것은 사물을 통해 그를 이해하고 보여주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피하는 것, 그에 대한 이해에 닿기를 거부하는 몸짓일 수 있다. 이는 <Temporary Home>이나 <Carrousel>도 마찬가지이다. <Carrousel>에서 나타나는 작업실의 열두 달 동안의 장면들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 보다는 숨기는 행위였고 이를 위해 작가는 스스로 온전한 소유의 실패를 감당한다. 이 환유적 몸짓은 언제나 부분적이고, 파편적이며, 불완전한 가능성만을 열 뿐이다.
성민화는 대상에서 계속해서 빠져 나가는 사물의 차원이 나타날 때 생겨나는 불편함과 낯섦, 자신을 초과하는 것들의 현전이 그의 장면들 위에서 자리를 차지하게(혹은 사건으로서 일어나게take place) 한다. 작가는 대상의 외양을 떠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극도로 정밀하고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재현하면서, 단일한 정량화가 어려운 시선의 움직임과 대상의 부분만을 그리는 선택을 통해, 대상의 외양에 틈을 드러낸다. 어떤 차원이 열릴 것인가? 성민화의 ‘보이_지않_는’이라는 더듬거림은 그가 언제나 부분적으로 실패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차원은 일어나자마자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 계속해서 어떤 규정지음을 연기시키며 우리 주위를 맴도는 그래서 느닷없이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가가 사물을 통해 비현실을 전유하고 현실을 소유하는 방식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이다.
현지연
[1] 다니엘 아라스, 『디테일』, 이윤영 역, 도서출판 숲, 2007, p. 14
[2]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윤원화 역, 현실문화, 2011, p. 184
[3] 조운 콥젝,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 김소연 외 역, 도서출판 b, 2015, p. 319
[4] 조르조 아감벤, 『행간』, 윤병언 역, 자음과 모음, 2015, p. 114
[5] Ibid., p. 126
[6] “댄디는 무의미한 것의 과도한 강조를 통해,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정의 내릴 수도 없는 아주 독특한 형태의 사용가치를 재창조해낸다.” Ibid., p.115 댄디는 자본과 상품의 흐름을 교란하고, 사물의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이다.
'un_se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at She Saw, What Was (not) Seen ,2016 (0) | 2017.09.12 |
---|---|
un_seen 2016_soloshow (0) | 2017.09.12 |